글:홍길룡/내외경제신문기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얼마 전 모 자동차전문가와 한국자동차 산업의 전망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끝에 내린 결론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기자들은 향후 국내 자동차 산업구도가 현대 - 기아차, 포드-대우차, 르노 - 삼성차의 3각 구도로 재편될 것이라 예상했었고, 이에 따라 어떤 차종이 국내에 도입될 것이며 소비자들의 패턴 역시 어떻게 변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15일 포드가 대우자동차 인수를 전격적으로 포기함으로써 국내 자동차산업의 구도는 다시금 혼란에 빠졌고 전문가와 기자들은 완전 ‘물’먹은 꼴이 되고 말았다.
정부와 채권단이 대우차 매각작업을 서두르고 있지만 강력한 인수후보인 GM - 피아트 컨소시엄과 다임러크라이슬러 - 현대차 컨소시엄이 확실한 인수의사를 표방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분할매각이나 위탁경영으로 정상화 후 매각 등 각종 처방이 난무한 상태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업체끼리 경쟁하던 국내시장이 더이상 우리만의 시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전 출범한 르노삼성자동차는 시장점유율이 1％ 미만에 그치고 있지만 나름대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전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국내자동차 업계가 이젠 본격적인 글로벌 경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전주곡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국내 업체들은 어떤가. 여전히 품질은 선진국에 비해 떨어지고
서비스의 질도 낙후돼 있다. 마케팅도 할부금융을 이용한 나눠 팔기에 그치고 있을
뿐 아직 진정 고객의 마음을 파고드는 마케팅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대우차도 결국은 해외업체로 넘어갈 가능성이 90％ 이상이다. 일부에서는 국내기업이 대우차를 인수한다는 등 다양한 소문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자금여력이나 사업능력 면에서 대우차와 같은 덩치를 경영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분할매각 방식이더라도 큰 덩어리를 인수할 만한 곳은 겨우 GM이나 다임러크라이슬러 정도만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르노삼성자동차가 국내시장의 글로벌화에 대한 전주곡이었다면 대우차 매각문제가 매듭지어지는 순간, 우리시장은 글로벌 경쟁의 한 가운데로 곧바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세계 자동차 업체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가운데 앞으로 5~10년
후면 연간 400만대 이상을 생산하는 빅5, 또는 빅6만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주장이 기정사실화되는 상황에서 우리시장이 글로벌화되는 것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뛰어 넘어야 할 장벽이다.
먼저 현재의 시장규모를 살펴보자. 간단하게 보면 연 300만대 생산규모에 내수 150만대, 수출 150만대로 볼 수 있다.
현대차는 중형 및 대형·승용부문에서 기아차는 레저차량(RV)부문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대우차의 경차 및 준중형 승용부문에 강점을 보이고 있지만 신모델 여력이 없고 효과적인 중형브랜드 이미지 굳히기에 실패해 수익성있는 중대형 승용차에서는 현대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계열사인 쌍용자동차의 경우도 RV부문에 강점이 있지만 LPG모델의 부재와 생산능력의 한계로 경쟁사인 기아에 비해 시장점유율이 현격히 떨어지는 상황이다.
대우차 및 쌍용차가 현대 - 기아차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신차 개발과 효과적인 마케팅을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자금력을 갖춰야 하는데 기업경영 여건이 그럴만하지 못한 것이다. 신차개발은 고사하고라도 효과적인 마케팅을 펼치는데도 힘겨워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외국업체가 대우·쌍용차를 인수 본격적인 경쟁을 선언한다면 상황은 불과 수년 내에 급변할 수 있다. 물론 인수자가 어떤 전략을 펼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연구개발 면에서 비용이 들지 않아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기술적 우위를 활용하여 지금보다 나은 품질의 자동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에 선진업체의 적극적 마케팅과 사후서비스가 결합된다면 대우차를 외면했던 소비자의 발길을 충분히 되돌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3~4년 내에 국내시장에 불 가장 큰 변화 중 또 다른 하나는 르노삼성자동차라는 새로운 경쟁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SM5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1％에 못 미치는 상황이지만 르노삼성차의 제롬스톨 사장은 5년 내에 연 50만대 생산체제를 갖추고 이중 50％를 국내에 투입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발언대로라면 르노삼성의 시장점유율은 17％에 달하게 되고 이미 내수시장이 포화상태라고 본다면 기존 국내업체의 시장을 잠식하는 셈이다.
이러한 외국업체의 약진 속에 우리 자동차 업계가 내수시장을 지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철저한 사후서비스와 효율적인 마케팅기법 밖에 없다. 어차피 기술·자금력에서 우리보다 앞선다면 승부를 걸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을 믿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자동차 업체들의 마케팅 기법을 보면 할부금융을 이용한 기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한 회사가 선도하고 다른 회사들이 따라가는 등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현대자동차가 최근 베르나와 EF쏘나타를 대상으로 3년후 차량가격의 43％(보장금액에 대한 거치이자 11.8％)을 보장해주는 ‘중고차 보상할부’를 도입했으며, 연이어 기아자동차는 스펙트라와 리오 등 15개 차종을 대상으로 인도금 45％를 3년간 납부유예(유예 인도금에 대한 거치이자 11.8％) 해주는 ‘인도금 유예할부’를 도입했다.
그런데 이 두 제도는 대우자동차가 7월에 도입한 ‘새로운할부 2000’과 아주 흡사하다. 대우는 7월 16일부터 ‘중고차 보장할부’와 ‘인도금 유예할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할부 2000’를 도입했다.
마티즈와 라노스Ⅱ, 누비라Ⅱ, 매그너스, 레조 등 5개 차종을 대상으로 3년후 차량가격의 40％(2년일 경우 55％)를 보장하거나, 인도금을 납입 2~3년간 납입 유예(보장(유예)금액에 대한 거치이자는 9％)해 주고 있다.
다행하게도 신차발표회 이벤트가 활성화되는 등 마케팅 기법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이 역시 한 회사가 시작하니 다른 회사가 따라 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대우가 1996년 10월 신차 라노스를 출시하면서 기존의 서울 중심, VIP 중심의
신차발표회 이벤트에서 탈피, 지방 대도시 순회 발표회를 가진 이후 1997년 9월 현대
아토스, 1998년 3월 삼성 SM5 등이 지방 대도시 순회발표회를 갖는 등 신차 발표시
지방 순회가 일반화됐다.
현대 기아로 대변되는 토종업체의 나아갈 방향은 철저한 고객서비스와 선진마케팅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사실 현대 기아가 국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상대적으로 대우보다 나은 기술력과 대우의 워크아웃 덕을 톡톡히 봤다. 거기다 현대차의 기아인수로 시너지를 발휘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외국업체가 들어온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비교우위를 누리기는 힘들다.
먼저 고객서비스 부문에 있어서는 품질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정정비소를 찾아본 사람이면 얼마나 불친절하고 정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지 직접 체험해 봤을 것이다. 두번째로 리콜과 같은 대 고객약속에 충실해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리콜을 해야지 그저 숨기고 쉬쉬하려 든다면 여지없이 철퇴를 맞는 것이 글로벌 시장의 생리다. 최근 세계 2위 규모의 포드자동차는 타이어 리콜 한 건으로 20억달러(한화 2조3천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국내업체 중 이 정도 손실을 입고 견딜 곳은 아무데도 없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마케팅 기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부금융으로 숫자노름하거나 신차발표회 이벤트 한번 하는 걸로 고객을 유인하기는 힘든 시대가 오고 있다. 고객시승도 활발히 하고 회사의 마케팅 전략도 일관성 있으면서도 독특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광고로 ‘우리 차 좋다’고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고객
중 광고만 보고 차를 구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차는
가장 비싼 소비재이면서 동시에 내구재다. 고객은 신중한 비교와 판단과정을 거치고
주위의 다양한 여론도 수렴한다. 기업전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는 가장
중요한 마케팅 활동이다.
외국 자동차 업체를 보면 차종별로 일관된 브랜드 이미지를 오랜시간 굳혀간다. 캐딜락이라고 하면 최고급 승용모델의 대명사처럼 굳어져 있다. 따라서 수십년동안 수많은 모델 체인지를 하면서 캐딜락의 이름은 더욱 강력한 이미지를 가져가는 것이다.
벤츠를 보면 차종별로 C, E, S클래스 등으로 나눠 지속적인 이미지를 형성해가고 있다. BMW 또한 3, 5, 7, Z시리즈로, 아우디는 A시리즈 등 차종별로 한 번 정한 이름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는 어떤가. 대부분의 차종이 모델이 바뀔 때 마다 차 이름도 바뀌어 지속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해가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대차의 쏘나타시리즈와 그랜저는 꾸준히 그 이름을 유지해 왔다.
여기서 생각할 점은 판매량과 브랜드 인지도를 살펴보면 현대 쏘나타와 그랜저시리즈는 최고의 판매량과 브랜드 인지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들이 성공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해 왔고 이에 따라 고객의 충성도도 쌓여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 번 쏘나타 고객은 영원한 쏘나타 고객이다’라고나 할까. 집안에는 가보(家寶)가 있고 나라에는 국보(國寶)가 있다. 기업에는 대표상품 또는 간판상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표상품은 나머지 상품들은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명차를 만들고 명차의 전통을 이어가는 브랜드이미지를 쌓아가는 일, 어찌보면 이것이 국내 자동차 업계들이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