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t DATA_HOME $env(UNIWEB_DOC_ROOT) source $DATA_HOME/init.appl ] 사진 그리고 여행 | 크렘린

사진 그리고 여행 |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 탐방 ③

크렘린, 러시아 역사와 문화의 중심

 윤창호 / 여행작가(사진 · 글)

10시간의 긴 비행 끝에 모스크바 교외의 세레미체보 국제공항에 내린 것은 저녁 6시가 가까워서 였다. 예약해둔 호텔에서 보내온 승합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에도 희끗희끗한 눈발이 어둠 속에서 명멸(明滅)한다. 간간이 끝없이 긴 백양목 숲이 보일 듯 말 듯 차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뜬 것은 아침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마치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커튼을 열었다. 내가 꿈꾸어 오던 모스크바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였다. 그러나 창밖은 아직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흰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벌판과 그 사이로 곧게 뻗은 도로 위를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다. 비록 해가 뜨는 시간은 늦지만 일터를 향해서 움직이는 시간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양이다.

 


▶ 아름다운 크렘린의 야경

모스크바라면 뭐니뭐니 해도 크렘린과 붉은 광장이다 싶어서 택시를 잡아타고 크렘린으로 향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택시를 타게 됐다. 도심은 의외로 정체가 심한 편이다. 낡은 택시의 카 스테레오에서는 간간이 ‘카츄샤’, ‘백만송이의 장미’ 같은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모스크바 강변도로에 접어들어서 다시 한참을 달리자 눈 앞에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서 간간이 보아 오긴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크렘린과 붉은 광장의 위용은 단연 압권이었다.


우선 시선을 끄는 것이 광장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성 바실리 성당이다. 형형색색의 9개의 둥근 원형 돔으로 이뤄진 이 성당은 정말 건축미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이 건물은 9개의 돔들이 각각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 각각 솟아 있지만 그 불균형이 기이하게도 기막힌 조형미를 자아낸다. 성 바실리 성당은 이반 대제가 카잔 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여 만들게 한 것인데, 1560년에 이 건물이 완성되고 난 뒤 이 건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시는 이런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설계자인 포스토닉 바르마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붉은 광장의 중앙에는 레닌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비록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정책 이후 레닌 동상이 철거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레닌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가슴에 신성시되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광장의 남쪽으로는 유난히 색깔이 붉은 적 벽돌로 지어진 네 개의 탑을 가진 아름다운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국립역사박물관이다. 이곳은 원래는 모스크바 대학의 교사의 일부였는데 1881년에 붉은 벽돌로 새로 지어진 후에 혁명 이후부터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혁명 이전의 석기 시대부터의 러시아의 역사에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러시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나폴레옹이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침대나 이반 대제의 의장 같은 유물들은 둘러볼만한 가치가 있다.

광장의 동쪽 크렘린의 맞은편에는 러시아 최대의 백화점인 굼 백화점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 러시아가 자본주의로의 과도기에 있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렵다지만 신흥 백만장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 모스크바 강변 풍경

▶ 크렘린의 전경. 크렘린은 지금도 러시아 정치 경제 역사의 심장부다.

▶ 크렘린의 외벽



▶ 성 바실리 성당, 9
개의 원형돔이 비대
칭으로 솟아있는 러
시아의 상징적인 건
축물이다.

▶ 서구 자본주의 사
상이 유입된 지금 붉
은 광장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런데 이곳 굼 백화점에 들어서면 비로소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아니 굳이 이 백화점이 아니더라도 거리를 달리는 수많은 세계의 명차들만 보더라도 대충은 짐작을 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백화점 내에는 세계 각국의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하다. 사실 지금까지 러시아 여성들이 아름답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는데, 이곳에서 직접 접해 본 옷맵시 내지는 패션감각 또한 세계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늘씬한 큰 키에 롱코트나 모피를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스크바 여성들의 모습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모스크바 아니 러시아는 발레를 비롯한 음악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내가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만난 몇몇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음악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볼쇼이 발레를 보러 가려고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서 포기하고 러시아의 가장 대중적인 공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커스 공연장을 찾았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서커스는 이미 점점 잊혀져 가는 과거의 향수 어린 풍물쯤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평일 공연임에도 거의 매회 좌석이 가득 들어 찰 정도로 아직도 러시아에서는 가장 사랑받는 대중 공연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의 서커스는 과거의 단순한 곡예나 묘기를 보여주는 것에서 탈피해서 점점 레퍼토리가 다양화되는 추세에 있다. 일테면 오페라를 방불케 하는 가창력과 무대 예술을 선보이는가 하면 마술 쇼를 보여주기도 한다. 관객과 배우는 하나가 되어 함께 박수를 치기도 하고 문답을 주고받기도 하며 공연장은 하나의 장을 이루고 있었다.

크렘린과 붉은 광장을 벗어나서 북쪽으로 걸어가면 화려한 모스크바의 거리가 펼쳐진다. 특히 10월 혁명 50주년 기념 광장을 기점으로 해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고리키 거리는 고급 의류매장과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아르바트 거리와 더불어 모스크바의 멋쟁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거리에는 곳곳에 와인 홍보용 입간판과 유명 패션 브랜드의 대형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고 고급 인테리어 소품 매장 등이 이어진다. 고리키 거리를 따라서 조금 걸어 올라가다보면 오른쪽 골목길 한 켠에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동상이 서있고 다시 10분쯤 걸어가면 푸슈킨 광장과 그의 동상이 서있다. 그런 세계적인 작가들의 동상들은 화려한 이 거리에 한층 격조와 품위를 더해준다. 사실 러시아만큼 세계적인 문학가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의 진원지라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의 근 현대사보다도 훨씬 깊고 풍부한 문화적 자양분을 지닌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