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리고 여행 |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 탐방 ⑥ 모로코 페즈

미로 속으로의 시간 여행 - 페즈

사진 · 글 : 윤창호 / 여행작가

 

모로코 북부의 항구 도시 탄제르에서 페즈로 가는 기차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부터 설렘은 시작되었다. 무려 3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역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역시 기차를 기다리는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그는 대뜸 내게 어디로 갈 거냐, 모로코는 처음 온 거냐 등등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내가 콜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더니 민트차는 마셔보았느냐고 묻는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대뜸 카운터로 걸어가더니 민트차가 든 은빛의 특이하게 생긴 주전자를 받아들고 와서는 내게 따른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당황하며 사양하자 그는 씨익 웃으며 모로코에서는 민트차는 무료이니 염려말고 마셔 보라며 권한다.

모로코의 자존심, 페즈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그 싸아한 맛과 향이 온 몸을 감돌면서 긴장이 풀어지고 비로소 내가 지금 북아프리카의 어느 먼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민트차의 사내나 다른 사람들에게 페즈에 대해서 물어 보았을 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페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이라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서 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자 자신들의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서기 8세기에 건설된 이 도시는 중세 이슬람 도시의 모습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사람들의 생활방식 또한 거의 예전의 모습 그대로여서 그 문화사적인 가치는 세계의 어느 유적지보다도 값진 것이다.이곳은 모로코의 지배자들이 바뀔 때마다 페시(Fessi : 페즈 시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야만 안심할 수 있었을 정도로 민심의 척도로 여겨져 왔고 많은 식민지배로부터의 저항과 독립운동은 페즈에서 비록되었다. 그런 만큼 모로코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페즈를 추천한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의 쿄토나 우리의 경주쯤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페즈는 신시가와 구시가 지역으로 크게 나뉘는데 페즈 엘 발리로 불리는 구시가 지역이 바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중세 이전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7,900여 개의 골목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 안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갖가지 수공예 공방들이 골목 구석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다. 현지인의 안내가 없이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특별한 문화유적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천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거의 변하지 않은 건물들과 삶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골목길을 걷고 있으면 시간 여행을 떠나 온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정도로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기억의 먼 저편에나 어렴풋이 남아있는 삶의 모습들이 아득한 향수를 자극한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람의 손으로 해결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문명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반문명주의자들도 아닐뿐더러, 우리가 흔히 보아 온 아프리카 오지의 원주민들도 아닌 터여서 오히려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먹을 것, 입을 것에서부터 갖가지 생활 도구들에 이르기까지 골목길을 걷다 보면 먹을거리 시장은 물론 구두 공방, 염색집, 대장간, 가죽 무두질 공장 등 수많은 공방들이 간판하나 없이 좁은 방에 서너 명씩 모여 앉아서 땀을 흘리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폭이 2미터 남짓은 되어 보이는 골목길을 이곳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당나귀가 쉴새 없이 오가며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잊혀지지 않는 정경 중의 하나이다.


사람의 손이 더 아름답다

페즈 엘 발리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가죽 무두질 공장 타네리(Tannerie)에 가까워지면서 동물들의 가죽들을 가득 실은 당나귀가 자주 옆을 스치며 지나가고 진하고 강렬한 염료과 생가죽 냄새가 골목 안을 휘감는다. 이곳은 중세 이전부터의 가죽 가공 공정을 지금도 여전히 모든 과정을 사람의 손으로 해결하는 가죽 무두질 공장으로 지금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주요 방문 코스로 되었다. 페즈 인근의 마을에서 당나귀 등에 시려 온 아직 털이 뽑히지 않은 뻣뻣한 가죽들은 이 무두질 공장에서 털을 뽑고 세척, 염색, 건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질기고 색깔 고운 천연 가죽으로 완성된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모든 작업 풍경들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요즈음 모로코 스타일의 인테리어 장식이 유럽이나 아시아 지역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페즈의 골목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 레스토랑은 그 화려함과 독특한 분위기로 찾는 이들을 매료시킨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과 올리브 향과 각종 공방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가 뒤섞인 이곳만의 독특한 향취에 취해서 따라 걷다보면 중간중간 눈에 띌 듯 말 듯한 작은 나무 간판들이 흙벽에 붙어있는데, 페즈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들의 간판도 예외는 아니어서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외부의 허름한 모습과는 다르게 꼬불꼬불한 골목 안쪽에 자리잡은 고급 레스토랑은 그 화려함과 모로코 특유의 인테리어 장식들로 꾸며져 있어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아랍 특유의 타일 장식과 전통의 기하학적인 문양들로 꾸며진 벽면 그리고 화려한 문양의 식탁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에스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로코 전국에 걸쳐서 가장 일반적인 전통 요리는 타진Tarjin이다. 닭고기와 강낭콩 등을 넣어서 끓인 찌개 요리로서 맛이 담백하고 영양가가 풍부해서 모로코인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영양식이다.

타네리 인근의 구리 제품 공방 주변은 늘 망치 소리와 쇠 톱질 소리, 화려한 황금색의 구리 쟁반이나 주전자 등을 들고 나르는 인부들로 왁자지껄하다. 그런 소음들과 가끔씩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풍물패들을 헤집고 걷다보니 이 도시를 상징하는 모스크가 눈앞에 우뚝 솟아있다. 바로 카라윈 모스크다. 매주 금요일에는 1천명이 넘는 신자들이 이곳에 와서 예배를 올린다. 이곳은 또한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인 카라윈 대학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흔히들 페즈를 찾았던 이들은 이곳에서 며칠을 보내도 좀처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각종 공방들의 소음과 땀에 절은 이곳 사람들의 체취가 온통 나의 감각을 마비시킨 듯하다. 참으로 오랜 만에 원초적인 사람 사는 세상 속으로 깊이 빠져든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