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 재즈가 슬프다고?

김태훈 / 팝칼럼리스트(경인방송DJ)

우리는 흔히 재즈란 흑인의 음악, 매니아를 위한 음악, 혹은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녀가 들려주는 재즈는 흑인만의 음악이 아니다. 소울감이 지닌 깊은 여운에 경쾌한 스윙의 리듬감이 더해져 백인 모드를 함께 지니고 있으며, 특유의 스윙감 넘치는 스캣은 보컬리스트를 연주자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또 한명의 분명한 연주자로 인식시켜내고 있다. 비운의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헐리데이에게 우린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라는 헌사를 보낸다. 그러나 엘라 핏제랄드는 한 명의 재즈 보컬리스트가 아닌 재즈 바로 그 자체였다. 발라드와 스윙, 즉흥 연주 그 모든 곳에 엘라의 이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음악은 어떤 음악이죠?"
"‥‥어설픈 섹스보다 나은 음악‥‥"

조니 미첼의 앨범을 선물한 어떤 여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음악에 부여한 '어설픈 섹스보다‥'는 내가 이후 만났던 낯선 음악,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음악에서 거두어 들인 뜻밖의 즐거움에 붙여지는 최상급의 평점처럼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정의는 고통으로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섹스에 대한 음악의 비교 우위가 아닌‥ 사랑과 삶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찾게 되는 모르핀으로서의 음악‥ 아마도 그녀는 음악을 빌어 자신의 우울함과 아픔을 이야기하려 했었을 것이다.

재즈를 처음 접하게 되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두 명의 아티스트가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온다. 하루키가 말했듯이, 신이 여성들을 위해 창조했다고 이야기한 쳇 베이커(Chet Baker). 제임스 딘을 닮은 젊은 날의 그의 의모와 상처 받기 쉬운, 그래서 끝없는 모성애의 발현을 이 끌어 낸 목소리, 그리고 또 한명의 아티스트, 빌리 헐리데이‥‥

10여 년 전 빌리 헐리데이의 곡 (I'm a Fool To Want You)가 광고 음악에 사용되었을 때, 그녀의 이름과 음악은 재즈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불리워졌다. 마치 케니 지의 음악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시작된 재즈와의 인연은 내게 항상 하나의 이미지만을 제공했다. 재즈는 고통으로 가득찬 음악이다. 빌리 헐리데이의 일그러진 삶과 통증에서 발화된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그런 선입견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왔다. 그리고 어느날인가는 '섹스보다 나은 음악'을 제안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리곤 했었다. "너도 빌리 헐리데이를 들었을거야‥ 분명히‥"

하지만 서른 살이 되고,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던 어느날, 이유 없는 삶의 긍정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거리의 음반 샵에서 흘러나오던 또 다른 여성 재즈 보컬의 목소리가 근거 없는 낙관을 제공했던, 그런 기억이 있다.

Ella Fitzgerald
<The Very Best Of Ella Fitzgerald>

재즈는 아픔으로 가득 찬 음악인지도 모른다. 무수히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의 생은 마약과 가난으로 채색된, 마치 고호의 '그것'과 같은 고통의 열정이 녹아 있다. 10대 시절 이미 생의 밑바닥을 경험한 빌리 헐리데이, 그리고 그녀가 들려주는, 상처입고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회한, 분명히 그것은 한 시대 재즈의 동의어였다. 그래서 재즈라는 음악은 한 밭을 대지에 단단히 붙여야지만 비로소 설 수 있는 인간들의 한계와 그 한계의 슬픔을 들려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재즈 보컬의 여왕이 들려주는 음악에는 삶의 환희와 사탕처럼 달콤한 생의 희열이 담겨 있다. 마치 재즈라는 장르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 들이고자 하는, 낯선 이데올로기라도 담고 있는 듯‥‥ 엘라 핏제랄드, 스윙의 여왕.

1917년 출생의 그녀가 1996년 사망하기까지, 적어도 재즈란 그녀에게만은 다른 뉘앙스를 가진 무엇이었다. 풍부한 성량이 뒷받침된 아름다운 미성‥ 미성의 재즈가 들려주는 낯선 이미지. 그리고 스윙‥ 고아와 다름없는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가 빌리 헐리데이라는 당대의 재즈 보컬리스트를 딛고 일어선 자리엔 전혀 다른 형태의 재즈 보컬 이 있었다.

1934년 17세의 엘라가 재즈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뉴욕의 아폴로(Apollo)극장에서 개최된 아마츄어 재즈 콘테스트였다.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음역과 감미로운 목소리로 우승을 차지한 그녀는 칙 웹(Chick webb) 오케스트라의 전설적인 색소포니스트 베니 카터(Benny Carter)의 발탁으로 인해 프로로서의 첫 발을 내 딛는다. 10대의 수줍은 많은 소녀였던 그녀에게 이 최초의 출발선은 많은 행운을 가져왔다.

밴드의 리더였던 칙 웹의 자상한 보살점 속에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녀는 뉴욕의 유명한 재즈 클럽 사보이 볼룸(Sayoy Ballroom)에서의 공연을 통해 재즈 팬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곧 이어진 전 미 투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려나가던 엘라는 일생의 대표곡으로 회자되는 <A-Tisket, A-Taske> 이 담긴 앨범으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 한다. 그러나 밴드의 리더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칙 웹의 돌연사로 인해 불과 21세의 나이였던 엘라는 밴드의 리더라는 새로운 자신의 운명과 조우하게 된다. 이미 스타의 자리에 올라있던 촉망 받는 보컬리스트였지만 약관의 나이로 밴드를 이끌어야 하는 중압감 속에서도 엘라의 천재성은 오히려 두드러져 보였다.

엘라 핏제랄드 오케스트라는 칙 웹의 공백을 훌륭히 메꾸며 당시 클럽의 최고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아갔다. 거칠고 고통스런 빌리 헐리데이의 보컬이 들려준 무거움을 벗어난 엘라의 감미로운 발라드의 보컬은 백인 취향이란 편견을 극복하며 새로운 재즈 보컬의 전형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오케스트라는 해체되고 본격적인 솔로의 길을 걷던 그녀에게 또 한 명의 가이드가 나타난다.

노만 그랜츠(Norman Granz), 당시 이미 명 프로듀서로 명 성을 얻고 있던 그는 엘라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자신의 밴드 투어에 그녀를 합류시킨다. 이후 이어진 데카(Decca) 레이블과의 계약, 그리고 발표된 최고의 앨범 (songbook) 시리즈를 통해 당대 최고의 재즈 아티스트듀크 앨링턴(Duke Ellington), 콜 포터(Cole Porter) 그리고 조지 거쉰(George Gershwin)과의 협연을 이루어낸다. 1930년대와 '40년대, 그녀는 이미 재즈 보컬의 정상에 올라있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이 짧은 기간에 그녀를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자리잡게 한 것일까?

트림페터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 발명(?)했다는 스캣(Scat). 소위 악기의 소리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어를 나열하며 목소리로 흉내낸 이 스켓의 발명은 엘라 핏제랄드라는 보컬리스트를 만나면서 재즈 사운드의 또 하나의 연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루이 암스트롱의 스캣이 그저 자신이 연주하는 트럼펫을 목소리로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앨라의 스캣은 재즈 특유의 스윙감을 획득하며 자유자재로 이어지는 즉흥 연주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I never considered myself a singer. My real ambition was to dance." 그녀가 자신의 음악을 설명한 구절에서 스윙감을 보컬에서 어떠한 영역으로 다루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마치 색소포니스트가 곡의 중심에서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을 들려주듯 보컬의 스캣으로 들려주는 그녀의 즉흥 연주는 재즈의 모토인 스윙을 악기가 아닌 사람의 성대로 변주해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재즈 보컬의 새 영역을 개척해낸 엘라 핏제랄드는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재즈란 흑인의 음악, 매니아를 위한 음악, 혹은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녀가 들려주는 재즈는 흑인만의 음악이 아니다. 소울감이 지닌 깊은 여운에 경쾌한 스윙의 리듬감이 더해져 백인 모드를 함께 지니고 있으며, 특유의 스윙감 넘치는 스캣은 보컬리스트를 연주자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또 한명의 분명한 연주자로 인식시켜내고 있다. 또한 앨범(songbook) 시리즈를 통해 일반적인 팝 팬들까지도 재즈라는 장르에 입문시키는 성공으로 매니아를 위한 음악이란 단정마저 무색케 하고 있는 것이다.

비운의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헐리데이에게 우린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라는 헌사를 보낸다. 그러나 엘라 핏제랄드는 한 명의 재즈 보컬리스트가 아닌 재즈 바로 그 자체였다. 발라드와 스윙, 즉흥 연주 그 모든 곳에 엘라의 이름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재즈는 언제나 흥겹다.

"Man, woman or child, Ella is the best." - Bing Gris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