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대 정체성 이론의 대두와 광고 이미지의 전개
1) 현대 정체성 이론의 대두
근대에 들어와 개인주의로부터 새롭고 결정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적 주체와 새로운 개념의 정체성을 설정해주고 있다. 신의 은총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 존재라는 중세적 인간관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인본주의 인간관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16세기 르네상스의 인간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 사이의 개인 주권자(sovereign individual)의 탄생은 과거와의 중요한 단절을 의미하며, 근대성의 체제를 가동시킬 요체가 되었다. 근대적 인간 주체는 두가지 현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하나는 주체란 분리할 수 없는 통합체라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 통합된 주체는 특수하고 고유하다는 것이다. (Williams, 1976)
후기 현대에 들어와 이러한 근대적 인간관에 변화가 일어났다. 근대적 주체는 소외뿐 아니라 전위(dislocation)에 의해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Hall(1994)은 20세기 후반의 후기 현대 담론 가운데 정체성의 위기를 마련한, 즉 데카르트(R. Descartes) 전통의 통합 주체를 해체하는 다섯 가지 탈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첫째, 가장 중요한 탈중심론으로 마르크스(K. Marx) 사상, 특히 1960년대 이후의 신마르크스 주의를 기초로 개체라는 개념을 붕괴시킨다. 즉 인간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보다는 생산방법, 노동력 착취, 자본의 순환과 같은 사회적 관계를 이론의 중심으로 삼아, Marx가 현대 철학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정적인 제안을 바꾸어 놓았다고 논했다.
(1) 인간에게는 보편적 본질이 있다.
(2) 그 본질은 그것의 진정한 주체인 '각각의 단일한 개인'의 속성에 있다.
이 두 가지 가정은 상호 보충적이고 서로 분해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들의 존재나 개체는 전체 경험론자적 이상주의자 세계의 외관을 미리 가정한 것이다. 그의 이론적 기초를 근거로 인간의 본질을 거부함으로써, Marx는 가정의 조직적인 체계 전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둘째, Freud의 무의식 이론 역시 위대한 탈중심론이다. 우리의 정체성, 즉 성적인 것과 욕망의 구조는 무의식의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과정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고, 이성과는 대단히 다른 논리에 따라 작용한다고 하는 Freud의 이론은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로 고정되고 통합된 정체성에 대한 전격적인 도전이다. Freud를 계승한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이 자신을 통합된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은 유아기로부터 점차 배워가는 학습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아가 습득하는 통합된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 특히 부모와의 동일성을 동경하는 환상적인 심리과정에서 형성된다. 라캉이 말하는 '거울 국면(mirror phase)'의 심리과정 속에서 유아는 거울 속에 비친 타인의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상상하는데, 이렇게 타인의 이미지를 통하여 자아를 '완전한' 인간으로 보거나 상상하게 된다. Freud의 주관성은 무의식적인 심리과정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사회화가 의식적인 학습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Mead(1955)나 Cooley(1967)의 '면경이론'(looking glass)의 개념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Lacan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것은, 언어·문화와 성별의 차이 등과 같은 상징적 재현의 다양한 체계 속으로 어린이가 들어가는 순간이다. 상징계로의 진입은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와 같은 부모에 대한 애증, 자신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마찰,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라는 심리적 갈등을 수반하는데, 이것이 분리 자아를 경험하는 주체성의 무의식적 형성과정이다. 주체는 언제나 의식과 무의식으로 양분되어 있지만 언제나 통합된 주체라는 환상적 결합을 꿈꾼다. 이것이 정체성이 갖는 근원적인 모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체성은 태어날 때 의식 속에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는 불안정한 과정인 만큼 우리는 정체성을 정체화 또는 동일화라는 과정의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결국 인간의 끊임없는 정체성 추구는 총체성의 결핍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으로서 충만함의 기쁨을 다시 맛보고자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셋째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들수 있다. Saussure는 우리가 언어의 저자가 아니라 기존의 언어 법칙과 의미의 구조속에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언어는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언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와의 차이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밤은 낮이 아니기 때문에 밤이며, '나'는 내가 될 수 없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구축되는 것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의미의 부재를 선언한다. 의미는 본래 불안정하고 차이의 연쇄로 인하여 결코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결국 정체성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네번째의 탈중심 논의는 푸코(Michel Foucault)의 작업에서 발견된다. 그는 '현대 주체의 족보'를 피력하는 가운데 '훈육의 힘'을 거론한다. 훈육은 규율과 감시를 행사하는 학교, 감옥, 병원과 같은 제도를 의미하는데, 그것의 목적은 그에 속한 개인들의 모든 생활을 감시하고 제압함으로써 인간을 '유순한 신체'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Foucault의 연구가 의미하는 바는 후기 현대 시대에 들어와 제도의 양상이 더욱 조직적이고 집단적이 될수록 개인 주체의 소외와 그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페미니즘의 영향을 들 수 있다. 페미니즘은 비판적 이론인 동시에 반전 운동, 반문화 운동, 학생 운동, 평화 운동, 인종 운동과 같은 1960년대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동구의 스탈린 주의를 동시에 배격한다든가, 동성애에 동조하는 비주류의 사회 혁명에 기여할 뿐 아니라, Descarts적 주체의 해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내부/외부, 공/사의 구분을 의심하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스트 명제를 내거는가 하면, 남녀를 인간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으로 파악하지 않고 성별의 차이를 내세움으로써 또 다른 측면에서 정체성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2) 현대적 정체성의 구성
인류학적·사회학적 민속학에 따르면 전통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견고했고 고정돼 있었으며 안정돼 있었다. 정체성은 이미 정의된 사회적 역할로, 사고와 행동의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했던 반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데 방향을 제시하고 종교적 인가를 제공했던 신화의 전통적 시스템으로 작용했다. 사람은 한 종족이나 부족, 집단, 고정된 친족관계의 틀 안에서 태어나고 죽었으며 삶의 역정은 정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전근대적 사회에서 정체성은 문제시되지 않았으며, 성찰이나 토론의 주제도 아니었다. 사람은 자기 상실을 겪지도 않았고 그들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도 않았다. 개인은 그 종족의 사냥꾼이었고, 구성원이었으며 그 역할과 기능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정체성은 유동적, 복합적, 개인적, 자기성찰적으로 되고 있으며, 변화와 혁신의 주체가 되고 있다. 현대에서 정체성은 또한 사회적이고 상호 관계적이기도 하다. Hegel에서 Mead에 이르는 정체성 이론가들은 개인의 정체성이 마치 타자의 인정과 이 인정에 대한 자기 확증(self-validation)이 결합해 형성되는 것인양 개인의 정체성을 상호 간의 인정이라는 시점에서 특징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서 정체성의 형태는 비교적 견실하고 고정돼 있다. 정체성은 여전히 제한된 역할과 규범에서 나온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고, 어떤 사람은 아들, 한국인, 스코틀랜드인, 박사, 사회주의자, 카톨릭 신자, 동성애자, 혹은 이 모든 사회적 역할과 가능성의 복합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정체성과 새로운 정체성의 경계가 계속 확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은 비교적 고정되어 있으며 제한되어 있다.
실제로 현대에서 자아 인식이 눈을 뜨고 있다. 사회적 역할과 가능성에 대해 재고하는 것이 가 능해지고 전통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것이다.(Kolb, 1986) 삶의 가능성이 변하고 확장되거나 축소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선택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능한 정체성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유효하고 인정받는 정체성을 얻기 위해 인증을 받고자 하므로 현대성은 또한 타인 지향성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대에 와서 정체성은 개인적 문제와 이론적 문제 둘 다 가지게 된다. 현대적 개인의 내부와 마찬가지로 정체성 이론들 사이에서도 어떤 긴장이 나타난다. 한편 일부 정체성 이론가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본질적 자아, 그 사람을 구성하는 자기 동일성과 타고난 요소의 맥락에서 규정한다. Descartes과 코기토(Cogito)로부터 Kant와 Husserl의 선험적 자아, 계몽주의적 이성개념, 몇몇 현대적 개념들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은 뭔가 본질적, 실체적이며 유일하고 고정되어 있고 근본적으로 변치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또 다른 정체성의 현대 이론가들은 자아의 비실체성을 가정하거나(Hume) 자아와 정체성을 실존적 투영으로, 진정한 개체의 창조로 여긴다. (Kierkegaard, Marx, Nietzsche, Heidegger, Sartre) 실존적 자아는 언제나 연약하여 자신을 지탱하기 위하여 위탁하거나, 결단과 행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개인은 정체성의 창조를 실존적 투영으로 만든다.
실제적으로 현대에는 상호 인정의 복잡한 과정 속에서 정체성을 얻기 위해 선택하고 재생산해야 하는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기대되는 역할, 규범, 관습, 가능성들과의 상호작용 구조가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현대에서는 타인이 정체성의 한 구성 요소가 되며, 타인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타인지향적 특성은 후기 현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Riesman et al, 1950)
또한 현대에서 정체성은 개체성과 연결되어 독특한 자아를 형성하게 한다. 그러나 정체성이 전통적으로 부족이나 집단, 집합체의 기능을 했던 반면 현대사회에서 정체성은 특수화한 개성을 창출하는 기능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소비사회, 미디어사회에서 정체성은 점차적으로 스타일, 이미지 생산, 외모와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스타일와 룩(look)의 모델들은 소비사회에서 도출되며, 개성은 현재의 소비사회의 고도화된 조작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만의 룩, 스타일, 그리고 이미지를 지녀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구성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며 자기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 가에 있는 것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이론가들에게 정체성은 자기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타고난 본성의 발견과 확증인 반면, 다른 이론가들에게는 정체성은 사회적 역할의 가능성과 실체의 구성이며 창조이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대체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본질주의자와 합리주의자들의 개념을 거부하고 구조주의자들의 개념을 토대로 하는 추세이다. (Kellner, 1995)
3) 정체성을 형성하는 광고이미지
월리엄슨(Judith Williamson)이 지적하듯이, 광고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특정한 상품, 이미지, 행동들과 동일시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한다. 광고는 어떤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당신'이 새롭고 더 매력적이고 더 성공적이며 더 귀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또한 광고는 소비행위, 패션, 외모를 바꾸면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연상을 하게 함으로써, 자기 변신과 새로운 정체성을 마술처럼 제공해 준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광고를 통해서 가치, 역할 모델, 사회적 행위들과 동일시 하는 것을 배운다. 이처럼 광고는 소비자 수요의 관리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화의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이다.
오늘날의 광고는 생산품을 파는 동시에, 광고 속에 엄청난 예술적 자원, 심리학적 연구, 마케팅 전략을 동원하여 병치시킨 이미지, 수사, 슬로건 들을 통해서 세계를 보는 관점을 파는 것이다. 이러한 광고들은 지배적 성별 이미지를 표현하고 강화하며 남성과 여성이 매우 특정한 주체위치를 취하도록 자리매김 한다. (Kellner, 1995)
소비를 표준화시키고 광고를 통해 취향을 형성시키려고 노력하는 소비자 자본주의는 자기도취를 심화시키는 데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교육 수준이 높은 분별력 있는 공중을 창조하겠다는 이념은 '외모에 지배되는 사회'의 소비자주의의 만연에 오래전부터 굴복해 왔다. 소비는 현대 사회생활의 소외화 경향을 들먹거리며 자신이 그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소비는 '올바른' 재화와 서비스의 소비를 통해 자기 도취자가 욕망하는 바로 그것들, 즉 매력, 아름다움, 개인적 인기를 약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현대의 사회적 조건에서 마치 거울에 둘러싸인 것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이 거울 속에서 흠없고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자아라는 외양을 찾고 있다. (Giddens, 1991) 신체는 더 이상 전통적 의례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먹여지고 꾸며질 수 없다. 신체는 자아 정체성의 성찰적 기획의 중심부가 되는 것이다. (Giddens, 1991) 육체가 산업에 의해 지배당하고 감정표현이 합리화되며 상상력이 상품화되는 현상은 모두 상업문화의 특성들이다. (Ewen, 1988)
현대의 딜레마는 개인화된 경험과 상품화된 경험 사이의 딜레마이다. 현대성은 자아의 기획을 열어 놓았지만, 상품 자본주의의 표준화 효과에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다. Marx가 지적했듯이 추상적 상품의 창조는 아마 자본주의가 전반적 생산체계로 확대되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요소일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은 끊임없는 확대라는 그 '명령'과 함께 전통을 공격한다.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대규모의 사회적 재생산 부문들은(결코 모든 부문은 아니지만) 생산물시장과 노동시장의 수중에 들어간다. 광고의 영역으로 성찰적으로 끌려들어간 '라이프 스타일' 개념의 타락 바로 그것이 이 과정을 요약해 주고 있다. 광고업자들은 소비자 범주의 사회학적 분류를 지향하는 동시에 특수한 상품 '패키지'를 조장한 다. 많든 적든 자아의 기획은 욕망하는 재화를 소요하는 기획이자 인위적으로 틀지워진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기획으로 귀결된다. (Ewen, 1988)
다음 절에서는 지금까지 고찰한 이론적 내용을 토대로 하여, TV광고에서 표현 가능한 자아 정체성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4) TV광고에서 표현 가능한 자아 정체성
이 장에서는 광고에서 표현 가능한 자아 정체성에 관한 내용 분석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5가지 범주를 설정했다.
(1) 동일시의 변증법을 통한 자아 확인
살아가는 전 과정 속에서 자아, 생명, 혹은 의미를 찾는 어린아이는 자신을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것에 자기애적인 리비도를 부여한다. 어린아이는 생후 6개월에서 8개월경에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 때 매우 강한 기쁨을 나타낸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보고 자신이 신체의 총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점차 자신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인식하게 된다. 거울 단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생후 1년 반경까지 계속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울단계의 중요성은 양면성이다. 즉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다. 거울단계는 자아가 기능적인 총체성을 획득하는 첫 번째 단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사실 어린아이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총체적으로 재현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신체를 파편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꿈이나 정신분열증에 자주 나타나는 환상을 통해 드러난다. 공격적인 환상, 몸이 파편화되는 환상, 자신이 둘이 되는 환각, 절단, 거세, 혹은 잡아먹히는 환상 등이 이에 속한다. (Lemaire, 1994)
(2) 신체를 통한 자아 실현
'신체'는 특히 '자아'나 '자아실현' 같은 개념들에 비해 간단한 개념인 것처럼 들린다. 신체는 우리 모두의 특권 또는 운명으로서 안녕감과 쾌락감의 원천이 깃들어 있는 객체이지만, 질병과 긴장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체는 단순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물리적 실체인 것만 아니라 행위체계이자 실천 양식이며, 신체가 일상생활의 상호작용들 속에 습관적으로 끌어들여지는 것은 일관된 자아정체감을 유지하는 과정의 본질적 일부이다.
자아 및 자아정체성과 특별한 관련을 가지는 신체의 여러 측면은 뚜렷이 구분될 수 있다. 신체적 외모는, 그 사람과 다른 행위자들이 볼 수 있는, 그리고 보통 행위를 해석하기 위한 단서로 이용되는 신체 표면의 모든 모습들-의상과 치장의 양식을 포함하여-과 관련되어 있다. 품행(demeanor)은 외모가 일상적 활동의 일반적 환경에서 개인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결정한다. 즉, 품행은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관습과 관련하여 신체가 동원되는 방식이다. 신체의 감각성(sensuality)은 쾌락과 고통의 기질적 처리를 지칭한다. 결국 우리는 신체를 종속시키고 있는 양생법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고도 현대의 탈전통적 환경에서는 외모도 품행도 주어진 그대로 조직될 수 없으며, 자아는 구축되어져야 한다는 원칙에 신체는 아주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감각성의 유형에 역시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신체 양생법은 현대 사회생활의 제도적 성찰성이 신체의 가꿈-어떤 사람은 창조라고까지 말할지도 모르겠다一에 집중되게 하는 최고의 수단이 된다. (Giddens, 1991)
(3) 자아 도취(나르시시즘)
현대의 대중매체와 고속통신, 편리한 교통의 결합을 통해 가속화된 노동의 이동은 공동체의 해체와 개인의 소외를 촉진시켰다. 19세기의 부르주아지는 부유한 도시 문화와 익명성, 관료주의적 공평성의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이주에 대응했다. (Raz, 1994)
Lasch(1980)에 따르면, 가부장적 가족의 쇠퇴, 그리고 실질적으로 가족 일반의 쇠퇴는 자아 도취의 등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옛날의 가족 권위를 대신하여, 또한 전통적 지도자와 현인들의 권위를 대신하여, 전문지식에 대한 숭배가 등장했다. 새로운 전문가들은 요법적 자아 도취 문화의 본질적 일부이다. 모든 유형의 전문가들이 일반인의 욕구를 돌봐주는 '새로운 가부장주의'(new patemalism)가 등장했다. 많은 현대적 형태의 전문지식은 순수하게 느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이 새로운 전문가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욕구를 창조한 장본인인 것이다. 전문지식에 대한 의존은 하나의 생활 양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아도취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아도취적 인성은 원래 유아적 의존성에 대한 방어에서 유래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의존성은 성인 생활의 대다수 영역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무력감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자아 도취가 강화되게 된다.
(4) 전통의 재구축과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복귀
운명적 순간에 한 개인은 자신의 실존과 미래 기획의 근본적인 측면들을 재고하게 된다. 삶의 주요한 전환점들은 대부분 외적 기준들이 다시 밀고 들어와 제 역할을 하게 되는 순간을 뜻한다. 출생과 죽음은 비유기적 삶과 유기적 삶 사이를 매개하는 두 가지 주요한 전환점으로, 이들이 지닌 보다 넓은 실존적 함의에서 우리가 벗어 나기는 힘들다.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전통적 의례도 개인의 행위를 도덕적 틀과, 그리고 인간 실존에 대한 본질적 질문과 연결시킨다. 이외에도 우리는 감금 완화를 장려하려는 노력에서 억압된 것의 복귀를 탐지할 수 있다. 감금 환화 경향의 기원은 의심의 여지 없이 복잡하다. Foucault는 광기가 현대적 이성의 승리에서 배제된 모든 것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Goffman에 따르면, 정신병은 일상적 상호작용이 전제하는 가장 기초적인 몇 가지 '상황적 속성들'을 따를 수 없거나 따를 용의가 없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세속의 '이면'들을 바라보면 그 우연적이고 나아가 제멋대로이기까지 한 성격이 드러난다. 정신병자나 그들 중 특정 집단은 전율, 즉 가핀클의 '신뢰 실험'이 보여주듯이 일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구성적 관습들이 억누르고 있는 바로 그 전율을 실제로는 무사히 해쳐나가는 것이다. (Giddens, 1991)
우리는 또한 현대사회 조건의 변화되는 요구에 대처하기 위해 전통의 재구축에 대한 몰두가 싹트는 것에서도 억압된 것의 복귀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대생활의 많은 부분들에서 전통적 요소는 종종 분절화되어 있고 행동에 대한 그 장악력이 부분적이기는 해도 여전히 잔존해 있다. 더욱이 현대 사회생활의 몇 가지 '전통적'인 모습들은 사실 오래되어야 현대 초기를 넘지 않는 발명품이다. (Hobsbaum and Ranger, 1983) 이들은 깊이 침전된 역사적 과거와의 고리를 보호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대적 조류를 보호하고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신념과 믿음의 부활도 언급할 수가 있는데, 오늘날 종교는 단순히 사라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우리는 주위 모든 곳에서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감수성과 정신적 노력이 창조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은 제도적으로 억압된 삶의 영역들을 집단적으로 재전유하려는 시도를 나타낸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현대성의 영향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문제들을 제출하지만-그리고 일정 부분 이 때문에-한 가지 중요한 예가 된다. 이 운동은 초기 단계에서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평등한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확보하는 데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현재의 단계에서는 사회적 실존의 본질적 특징들을 제기하며, 근본적인 사회적 전환을 향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생태운동과 평화운동 역시 인간의 권리를 위한 몇몇 종류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후기 현대에 대한 이 새로운 감수성의 일부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비록 내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현대성의 불가항력의 수레에 연료를 공급하는 몇 가지 기본 전제들과 조직 원리들에 효과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5) 섹슈얼리티의 재구성
Foucault가 말했듯이, '섹슈얼리티'는 19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말이다. 섹슈얼리티라는 낱말은 이미 1800년대에 생물학과 동물학에서 기술적인 용어로 존재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 하는 것-옥스포드사전은 '성적인 혹은 성을 갖는 것의 성질'이라고 풀이한다-과 유사한 의미로 널리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경이다. 이러한 의미는 오늘날 Foucault의 발상으로부터 새로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Foucault의 논의 속에는 페미니즘의 주요 분석 대상(가령 여성의 신체, 섹슈얼리티, 사회적 성차 등)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의 계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위력적인 것은 종래 페미니즘의 기본 개념이었던 sex/gender의 의미 구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McNay, 1992)
'sex = natural'/'gender = cultlual'이라는 정식은 섹슈얼리티 자체가 지배의 장치로서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수용한다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에서의 섹슈얼리티는 출산과 분리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삶과 죽음의 우주적 과정과도 분리되게 되었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여전히 어떤 도덕적 책무와 일반화 가능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섹슈얼리티를 파트너에 대한 이기주의적 관심과 분리시킨다. 섹슈얼리티는 낭만적 관계가 등장하기 전에 보통 성적 사랑과 관련되어 있었던 도덕적 채무감 및 잠재적 비극감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현대적 담론이 Foucault가 말하는 섹슈얼리티에 몰두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이러한 관련에 대한 인정을 나타낸다.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삶에서 도덕을 초월하는 조건과 경험을 지닌 관계에 실질적인 형태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를 거부한다. (Giddens, 1991)
Alberoni(1983)가 지적하고 있듯이, 일상적인 성적 만남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이러한 현상을 요약해 준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섹슈얼리티의 대다수 형태와 반대로 격렬하고 분출적이며 특별히 '비상한' 것이다. "이런 사랑의 순간들에 섹슈얼리티는 삶이 가능계의 한계, 상상계의 지평, 전우주의 지평을 탐험하는 수단이 된다. "
'성 혁명(sexual revolution)'은 성적 관용이 단지 성차-중립적(gender-neutral)으로 진전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기본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여성의 성적 자율성에서의 혁명이다. 물론 이것의 선조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중요한 변화는 바로 최근의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Ehrenreith et al, 1987) 그것이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미친 결과는 매우 심대한 것이며 상당 부분 아직 종결되지 않은 혁명이다. 두 번째 요소는 여성과 남성의 동성애의 번성이다. 남녀 모두의 동성에는 성적으로 보다 '정통적(orthodox)'인 것에 대하여 새로운 성적 영역을 확보해 왔다. 이 두 가지 모두는 1960년대 사회운동이 내세웠던 성적 자유주의와 관련되지만, 그러한 자유주의가 조형적 섹슈얼리티의 등장에 필연적이라거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운동이 초래한 것보다도 더 심층적이고 불가역적인 변화들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Giddens,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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